버스에서 내린 연주는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아의 말대로, 보이는 것이라곤 저 멀리 무리 지어 서 있는 회색 아파트 단지와 그 앞에 자리한 반짝이는 복합 건물,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차들과 잿빛 도로뿐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막했다. 여기서 어떻게 길을 찾지. 길잡이로 삼을 만한 상점이 없어 지도 앱을 보던 연주는 잠시 멍해졌다. 그때 건너편 인도에서 걸어오는 정아가 보였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꿰어 신은 정아가 이편으로 건너오라는 의미의 손짓을 했다.
내 말 맞지? 아무것도 없댔잖아. 연주는 정아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괜히 딴지를 걸었다. 아무것도 없기는. 아파트도 보이고 회사도 있는데. 초여름의 햇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거렸던 건물은 막상 가까이서 보니 괴괴한 기운을 풍겼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입주 전인가? 연주의 물음에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지식 산업 센터인데 분양이 안 됐어. 기업들이 여기까지 안 오는 거지. 연주는 관련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너는 투자 사기 같은 거 안 당했지?
정아는 거의 그럴 뻔했으나 운 좋게도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연주는 그만한 돈이 있었느냐고 물은 뒤에야―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 고시촌에 살면서 컵밥 하나를 나눠 먹기도 한 사이였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함께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으므로― 정아의 경제적 상황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아는 넓은 평수의 신도시 아파트에 살았고 남편과 각자 한 대씩 중형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서준이가 몇 살이더라? 한동안 서로 뜸하게 연락했던 것을 의식하며 연주가 물었다. 정아는 여섯 살이라고 답하면서 서준이는 어린이 태권도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중이고, 서희는 엄마가 봐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따 서준이 데리러 같이 가. 연주도 무조건 가야 한다는 어투로 들렸다. 원래 정아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도 상대에게 먼저 의사를 물어보는 사람이었는데 이젠 그런 성향이 옅어졌다. 이번 일도 그랬다. 연주의 엉뚱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으나 조건을 걸었다. 여기로 올 수 있어? 묻지 않았고, 왔으면 좋겠어, 부탁하지도 않았다. 네가 와. 다른 대답은 할 수 없게 말하면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물론 부탁하는 사람으로서 서운해할 일은 아니었지만, 연주는 망설임 없는 정아의 태도에 약간의 거리감을 느꼈다.
근데 그런 걸 왜 찍는 거야? 연주가 전화로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이유가 뭔지 묻지도 않고 수락했던 정아가 뒤늦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연주는 준비한 대답 대신 충동적으로 다른 말을 꺼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소중한 순간들을 다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정아가 어떤 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걸 잘 몰라서 너희들은 어떤지부터 알아보려고. 정아는 별 실없는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가로수가 띄엄띄엄 심긴 적막한 도로변을 걷던 연주는 문득 첫 아이를 낳은 정아를 만나러 산후조리원에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기진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정아는 연주를 보자마자 말했다. 넌 애 낳을 생각하지 마. 마음이 약해서 안 돼. 연주는 미약한 저항심이 일었다. 내가 애를 낳지 말아야 할 정도로 마음이 약한가? 너 그래. 정아는 단호했다. 정아가 자신을 그 정도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연주는 그날 기분이 좀 상했으나,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뒤엔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연주에게 아이를 갖는 건 결혼 여부를 떠나 마음의 준비가 오래 필요한 일이었고 그걸 기다리는 동안 임신이 어려운 나이에 접어들게 될 가능성이 컸다. 정아는 연주보다 그걸 먼저 알았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신전처럼 거대한 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기둥 사이를 통과해 단지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연주의 손에는 서른 롤짜리 두루마리 휴지가 들려 있었다. 고시촌에 살았을 때 그들은 학원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함께 훔쳐 온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생활비가 먼저 떨어지면 서로 망을 봐 주면서 종종 그렇게 했다. 그런 시기를 거쳐 정아는 시험에 합격했고, 연주는 근소한 점수 차로 낙방을 거듭한 뒤 결국 시험을 포기하고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출발이 한참 늦었다는 생각에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해 작은 전셋집을 마련한 연주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번듯한 사회인으로서 넘어야 할 단계를 잘 뛰어넘은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전셋집 다음은 자가 마련, 그다음엔 SUV를 사서 캠핑카처럼 꾸미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땐 연주에게도 소중한 순간들과 떠올릴 때마다 즐거워지는 꿈이 있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가 정아였다. 친했다고 볼 수 있는 세 명의 친구 가운데 나머지 두 명은 각각 남쪽 해안 도시와 캐나다로 떠났고 연주만 서울에 남아 있었다. 만일 내가 그들처럼 서울을 떠났더라면 전세금을 지킬 수 있었을까. 혼자가 아니었다면 사기를 당하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주는 그렇게 자책했다. 만에 하나 전세금을 돌려받게 되더라도 사람을 믿은 것에 대한 후회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아의 집으로 들어가자 층간 소음 방지 매트를 깔아 놓은 거실 바닥에 정아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품에 서희를 안은 채였다. 연주는 어머니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서 무릎걸음으로 서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작고 빨간 얼굴과 고물거리는 손가락. 그늘 없이 밝게 자랄 수 있게 지켜 주고 싶었다. 연주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서희를 옮겨 안은 정아가 불쑥 영상을 안 찍고 뭐 하느냐고 말했다. 정아의 소중한 순간이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연주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녹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뭐 하는 거냐고 묻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아가 미리 일러둔 모양이었다. 엄마는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어. 연주한테 결혼을 왜 안 하냐, 애는 언제 낳으려고 그러느냐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마. 연주는 그런 상상을 하며 어머니 쪽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돌렸다. 나는 찍지 마. 다 늙은 사람을 뭐 하러 찍어. 아니에요, 예쁘세요. 어머니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정아가 서희를 다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주고서 어쩐지 애처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연주는 그런 정아의 얼굴을 크게 확대해 화면에 담았다. 정아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아파트 단지 후미진 곳에 흡연 구역이 있었다. 정아가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물었다. 연주는 정아의 입에서 나오는 흰색 연기만 카메라에 담았다. 담배를 천천히 다 피우고 나서 정아는 서준이를 픽업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없게 해서 미안하지만 내 하루가 원래 이래. 서준이 데리고 내가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가자.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가며 정아는 콧노래를 불렀고 연주는 망설이다 그 모습은 찍지 않았다. 차의 시동을 걸고 나서 정아가 라디오를 틀었다. 진행자와 패널이 동시에 와하하 웃었다. 뭐 해, 안 찍고. 정아의 말에 연주는 녹화 버튼을 눌렀다.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는 정아의 옆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여기로 이사 와선 라디오 듣는 게 좋아지더라.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이 하나같이 다 재미있어.
너는 소중한 순간이 하루에 몇 번이나 있네. 시샘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를 연주의 말에 정아가 사이를 두었다가 대꾸했다. 여기 온 뒤로는 하루하루가 똑같거든. 그게 좋으면서도 가끔은 무서워. 그래서 좋아하는 걸 많이 만들려고 노력한 거야. 연주는 자기도 한번 그렇게 해 볼까 싶었다. 매일 똑같은 동선과 풍경 그리고 라디오. 달리 보면 평화로운 일상일 수도 있었다. 라디오를 들으면 멀어진 사람의 안부를 확인하는 기분이 들지 않아? 연주의 말에 정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건 슬픈 느낌에 가까운 것 같다고 답하더니 되물었다. 너는 멀어진 사람의 안부를 굳이 확인하고 싶어? 그 말에 연주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었다. 이래서 정아가 나에게 마음이 약하다고 한 걸까. 그럼에도 연주는 꿋꿋하게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러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부만 확인하려는 건데도 일상이 침범당한 기분이 들까? 정아가 깜빡이를 켜고 신호를 한참 기다리다 답했다. 그건 아닐 거야.
어린이 태권도 교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하자 정아가 물었다. 같이 갈래, 여기서 기다릴래? 연주는 차에서 내리는 걸 택했다. 정아의 소중한 순간을 놓칠지도 모르니까.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정아가 잠시 후 서준의 손을 잡고 나왔다. 서준이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 그러곤 갑자기 가방 안에서 줄넘기를 꺼냈다. 여기서 해야겠어? 지금? 정아가 서준에게 묻더니 연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한테 자랑하고 싶나 봐. 겨우 열 번밖에 못 넘으면서. 연주는 낯선 이모를 만나자마자 줄넘기 실력을 보여 주려고 마음먹은 서준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되었다. 불시에 찾아오는구나. 소중한 순간은 정말 불시에. 연주는 그들을 함께 찍어 달라며 정아에게 휴대폰을 주었다.
너 무슨 일 있어? 휴대폰을 돌려주면서 정아가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서준이 힘차게 줄을 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연주는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젠 괜찮아졌어. 서준이 열, 하고 외치면서 높이 뛰었다. 괜찮아졌다고 말하고 났더니 연주는 정말로 조금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서준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열하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열 번밖에 못 넘는다고 말했던 정아가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열둘, 하고 미리 외치며 연주도 따라 웃었다. 그러자 열하나를 넘고 나서 줄에 발이 걸린 서준이 실망감과 원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연주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누더기처럼 기워 놓은 연주의 마음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연주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그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질 때까지.
단지 안부만 물으려던 게 아니었음을 연주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안부는 본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