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무엇일까? 내 기준에서 친구란 ‘같이 짜파게티를 끓여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다. 짜파게티를 먹다 보면 입 주위가 지저분해진다. 나는 입에 춘장을 묻힌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지금 내 입술이 더러우면 어쩌지?’ 같은 걸 신경 쓰면 짜파게티를 자유롭게 먹을 수가 없다. 나는 자주 체한다. 지금보다 어릴 때 내가 체하면 할머니가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줬다. 검붉은 피가 나오면 내 안의 부끄러움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앞에서는 무엇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의 좋은 친구였다.
그렇다. 문제는 짜파게티가 아니다. 나는 내가 부끄러워서 자꾸 체한다. 마치 옛날 아빠의 말처럼 나는 내가 “낯부끄러워서 어디 내놓을 수가 없다.” 나는 내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부끄럽다. 예를 들어 인기 많은 송지혜가 친구들에게 초콜릿 선물을 왕창 받을 때 나는 샘이 나서 속으로 나쁜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 점퍼에서 삼천 원을 훔친 적이 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건 완전한 도둑질 같았지만 옷에서 꺼내는 건 조금 덜 도둑질 같았다. 또 나는 김은정의 신발에 우유를 쏟아 놓고 내가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뗐다. 김은정은 신발이 젖은 줄도 모르고 신었다가 양말까지 버렸다. 김은정은 누군가가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신발에 우유를 부은 거라고 말하면서 범인을 찾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우유를 쏟은 건 정말 실수였다. 김은정과 김은정을 위로하는 아이들에게 멀찍이 떨어진 채로 나는 불안에 떨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목하며 “내가 봤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정말 엄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멀리 도망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다짐을 하는 대신 김은정에게 사과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아주 뒤늦게 들었다. 그런 생각을 뒤늦게 하는 내가 싫다. 잘못했을 때 바로 말하지 않고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는 내가 너무 별로다. 나는 나의 못나고 비겁한 조각을 다 알고 있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내가 부끄럽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 나 같은 애는 반드시 친구를 실망시킬 테니까. 친구가 나를 좋아하다가 실망해서 사이가 멀어지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친구 없는 상태가 낫지 않나?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생각으로 외롭던 어느 밤 나는 일기장에 썼다.
나라면 나 같은 애랑 친구를 할까?
그다음 문장은 선뜻 쓸 수가 없었다. 마음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배신자니까.’라는 문장이 떠올랐지만 그걸 내 손으로 쓸 수가 없었다. 나를 배신자라고 쓰려니 비참했다. 그래서 다른 문장을 썼다.
나 같은 애가 무슨 뜻이냐면 외톨이가 되기 싫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걸 좋아하는 척하는 애야.
그 문장을 쓴 이유는 조성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성아는 전학생인 나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 줬다. 너는 어디서 왔어? 네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야? 물어봤다.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밥을 다 먹고는 같이 놀자고 했다.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울려 놀다 보면 나는 또 우유를 쏟아 놓고 내가 안 그런 척할 수도 있고 샘이 나서 마음으로 나쁜 소원을 빌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성아는 나를 계속 아이들 속으로 끌어들였다. 조성아는 나에게 “네가 전학 와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나도 좋다고 대답했지만 거짓말이었다. 낯선 곳이 어색하고 두려웠다. 아이들 이름을 외우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내가 실수로 이름을 잘못 불러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아이들이 내 성적이나 집안 형편을 알고 나를 비웃는 상상을 너무 많이 해서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조성아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말이나 행동을 과장했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맛있다고 했고 즐겁지 않은데 너무 재밌다고 했고 궁금하지 않은데도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척 연기를 했다. 조성아가 나의 진심을 알면 나를 가식적이라고, 배신자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나는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혼자이기 싫었다. 나도 나의 진심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누구에게 배신자인가? 나는 나의 진심부터 알아야 한다.
나는 친구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늘 걱정하지. 그 마음이 힘들어서 혼자 있고 싶은 거야.
진심을 쓰고 나니 괜히 울고 싶다. 그래서 한 문장을 더 쓴다.
친구들이 싫은 건 아니야.
나는 조성아의 말과 행동만을 듣고 볼 수 있다. 조성아가 나에게 ‘좋다’고 말했으면 나는 그 말을 굳이 의심할 필요 없다. 나는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조성아의 말을 의심한다. 아니 실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의심한다. 나는 나의 진심을 더 써 본다.
친구들이 나를 싫어할 거라고 미리 생각해 버리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나?
고개를 흔든다. 친구들은 나에게 관심 없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다. 굳이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그런 감정 없이 그냥 지내는 아이들이 훨씬 많으니까. 또 다른 진심이 떠올라서 쓴다.
내가 나를 진짜 싫어한다면 상처받기 싫어서 겁내지도 않을 거야. 나처럼 형편없는 애는 상처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할머니랑 같이 수박을 먹던 옛날이 기억난다. 수박을 베어 물 때마다 즙이 흘러서 티셔츠의 목 부분까지 다 젖었는데 그냥 계속 먹었다. 할머니가 수건으로 나의 입과 목을 닦아 주며 말했다. 수박을 잘 골랐네. 참 달지? 그래서 깨달았다. “누가 보면 우리가 널 굶기는 줄 알겠다.”고 말하는 대신 그냥 닦아 줄 수도 있다는 걸.
할머니 있잖아, 먹는 모습에서 그 사람의 교양이 보인대.
내 말을 듣고 할머니가 물었다.
아빠가 그랬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말했다.
일곱 살 애한테 교양은 얼어 죽을. 너 교양이 뭔지는 알아?
나는 곰곰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얌전한 거?
할머니가 말했다.
맛있는 걸 맛있게 먹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는 게 교양이야.
따지고 보면 아빠는 맛있는 것도 맛없게 먹는 편이었다.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대신 “이번에는 좀 덜 짜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아빠에게 맛있는 걸 맛있게 먹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 가까웠다. 아빠는 나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할머니,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야.
할머니가 갑자기 수박씨를 퉤, 하고 멀리 뱉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해 봐, 재밌어. 나는 주저했다. 할머니가 수박씨를 또 멀리 뱉었다. 그래서 나도 뱉었다. 수박씨 멀리 뱉기 놀이는 재미있었다. 수박을 다 먹으면서 놀이도 끝이 났다. 할머니가 배를 두드리며 잘 먹었다고 중얼거렸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했다.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 기억은 마치 할머니의 바늘 같다. 떠올리면 왠지 치료받는 기분이고 내 안의 부끄러움이 빠져나가니까. 하지만 자주 떠올리진 않는다. 미소가 새어 나오다가도 슬퍼지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할머니에게 야단맞을까 봐 무서워한 적도 있고 실제로 할머니한테 크게 야단맞은 적도 있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 적은 없다. 나의 진심에는 이렇게 따뜻한 마음도 있다. 그렇다면 따뜻한 마음을 써 보자.
내가 전학 갈 거라고 말했을 때 한수빈은 울었다. 마지막 날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수빈이와는 짜파게티를 먹지 못했다.
여름방학 전에는 조성아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짜파게티 먹을래?
먼 훗날 친구들이 나를 떠올릴 때 꽃다발을 받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