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메이트
봄 냄새가 나. 산을 오르는 동안 희준은 말했다. 희준의 말에 유수는 코로 흠뻑 공기를 마셔 보았다. 그러네. 봄 냄새가 나. 그들은 마주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펴고 앉는 곳에 그들도 앉았다. 가져온 삼각김밥과 보리차를 꺼냈다. 희준은 보리차를 건네며 유수에게 말했다. 너 또 2리터짜리 보온병 가져온 거 아니지? 유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아.
그들이 함께 한 최초의 등산에서 유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과도하게 준비했다. 4인용 돗자리와 (정확히는) 1.8리터짜리 보온병. 녹차 티백 한 박스. 도라에몽처럼 준비해 온 것을 주섬주섬 꺼내는 유수를 보며 희준은 놀란 얼굴로 박장대소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을 유수 덕분에 알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후에 산에 오를 때마다 희준은 그 얘길 했다. 오늘은? 오늘도? 하고. 유수는 언제나 머쓱한 표정으로 아니야…… 안 가져왔어……라고 대답하며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를 꺼내 보였다. 삼각김밥을 한입 먹고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희준은 말했다. 그래도 그거 좋았어. 뜨거운 물 잔뜩이랑 티백. 우리 그거 다 마시고 내려갔어. 맞아.
둘은 바위에 앉아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여기저기 가리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희준과 유수는 한두 계절을 함께 보낸 사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5, 6년이 흘러 있었다. 시간 빠르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엔 언제나 그 문장이 섞여 있었다.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둘은 종종 도전이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찾는 사이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든든했다. 언제는 요가였고 언제는 등산이었고 언제는 스키였고 언제는 낚시였다. 나답지 않은 걸 하고 싶을 때. 한 번만 시도하고 그만둘 거지만 해 보고는 싶을 때. 그런데 어쩐지 혼자 하긴 결심이 안 서고 둘이서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희준이 유수에게, 유수가 희준에게 넌지시 물었다. 같이 갈래? 그렇게. 상대방이 그래, 하고 말하면 그들은 레깅스를 입고, 청바지를 입고, 조거 팬츠를 입고, 반바지를 입고 어디든 갔다.
그들은 말하자면 도전 메이트. 달리 말하자면 취미가 없던 사람들이었다. 온오프라인의 커뮤니티에 몸담지도 못하고 혼자서 하는 게임도 꾸준히 하지 못했다. 중도 포기가 일쑤. 매번 새로운 취미를 향해 돌진하지만 매번 새로운 취미에 도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체력과 기분, 둘 다 도와주는 천운의 날에 그들의 시야에 걸려든 것만 그들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할 수 있었다. 한쪽이 꾸물거려도 한쪽의 체력과 기분이 모두 동하면 "같이 갈래?"라고 말했고, 그러면 그것은 도전의 영역에 들 수 있었다. 체력과 기분은 그러니까 나름의 예심인 셈이었다.
그들이 도전한 많은 것들 중 살아남은 것은 등산이었다. 산은 어디에나 있었고 웬만큼 난이도가 높지 않으면 별다른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대중교통만으로 약속 장소까지 갈 수 있었다. 준비와 시작 사이에 장애물이 적은 것. 도전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요건은 사람의 체력과 기분을 제외하면 그것이 주요했다. 많은 도전이 그렇게 시작되는지는 모르지만, 둘에게 처음 등산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왔다. 첫 등산을 돌이켜 볼 때 그걸 등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둘은 종종 갸웃거렸지만 산을 오르는 게 등산이지 뭐…… 하고 그것을 첫 등산이라고 쳤다. 둘의 첫 등산은 겨울 산. 한 팀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처음 둘이서 가야 했던 출장에서 오른 산이었다.
그 산 이름이 뭐였지? 몰라. 둘의 기억은 같고도 달랐다. 비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고 비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중요한 정보를 중요하지 않게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둘은 모두 산의 이름은 몰랐고, 산에서 들른 절의 이름도 몰랐지만, 등산로 한쪽에 꽂힌 식물 정보판에 ‘조릿대’라고 적힌 것을 보고 동시에 조릿대…… 하고 중얼거린 것을 기억했다. 절을 구경하다가 입구에 있는 매점에서 비슷하게 생긴 염주 팔찌를 사서 나왔던 것을 기억했다. 내려오는 길에 여기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면? 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던 것을 기억했다. 산에서 내려오자 눈이 내렸다. 보기 좋게, 펄펄 내린 것은 아니고 아쉽게 내렸지만 분명 이게 첫눈이야! 하고 기뻐했던 것을 기억했다.
봄의 산에서 삼각김밥을 씹으며 유수는 그런 것을 떠올렸다.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의 여름 산에서, 유수는 도전 메이트가 사라질까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바위가 많은 산을 오르느라 헉헉거리다가, 중턱 즈음의 나무 계단에 걸터앉아 오이를 씹던 희준이 말했다. 아이를 가질 거야. 그 말을 듣고 유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자괴감이 들었다. 응원할 줄도 모르고, 적당한 정보를 건네줄 줄도 모르고, 당황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 전날 유수는 모르는 남자와 잤다. 이상하게 그 일을 희준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자괴감은 수치심이 되었다. 나는 취해서 몸도 못 가누고 졸음에 겨운 와중에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잤는데. 이 나이를 먹고도 철없이 그런 짓에 괴로워하는데…… 희준은 엄마가 되려고 한다, 그런 생각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숨길 틈도 없이 얼굴에 떠올라 버린 것이다. 이제 희준과의 시간은 사라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겨울도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을 때 희준은 아이를 가졌고, 그러다 아이를 잃었다. 유수는 자신이 여름의 등산 전날 누구와 잤는지도 잊었고, 그러다 문득 그 남자에게 다시 연락이 왔을 땐 떠오른 기억에 괴로워했다. 봄이 오기 전 그들은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희준은 자신이 했던 말 때문이었고 유수는 자신이 하지 않았던 말 때문이었다. 희준과 유수 사이에 뭔가가, 가늘고 힘없는 가시 같은 게 끼어 있었다. 너무 가늘고 너무 흐릿해서 더듬어 찾아 빼내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가만히 있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따뜻해진 날씨였다. 희준은 메신저로 유수에게 말했다. 우리 성공하기 진짜 쉬운 도전 하는 거 어때? 어떤 거? 유수는 한 번에 감을 잡지 못했다. 희준이 왜 그런 걸 하자고 하는지도.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알았다. 물어본다는 것은 조금 괜찮아졌다는 것. 나 뭘 좀 성공하고 싶어.
희준에게 그런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유수는 파티션 아래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좋아. 유수는 마음에 후드득 떨어지는 모래알 같은 느낌을 애써 외면하며 그러자고 했다. 그런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둘은 이런저런 성공하기 쉬운 도전들을 주고받았다. 아주 조금 어렵고 결국 성공하는 거. 그런 거 하자. 그래 그러자. 뭐 할까. 음…… 지역 맛집 오픈 런. 장갑 뜨기? 등산. 등산? 너무 힘들지 않아, 그건? 산 나름이지. 껌인 산도 있겠지. 등산 좋다. 아예 낯설지도 않고, 얕은 산도 있고. 좋아.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등산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그들은 약속을 세 번 미뤄야 했다. 한번은 희준이 시댁 일 때문에 갑자기 약속을 취소해야 했고. 그다음 주에는 비가 내렸다. 또 그 다음 주는 유수가 대학 동기 결혼식 일정을 잊고 날을 잡아 버렸다. 주말이 지나 회사에서 마주치면 둘은 머쓱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점심시간에 만나서 한숨을 쉬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성공하기 쉬운 건 없나 봐. 희준은 무척 시무룩해 보였다. 유수는 그런 희준의 어깨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선뜻 안아 주진 못했다. 그저 팔꿈치를 가볍게 잡고 흔들며 더 힘주어 말했다. 이번 주는 꼭! 이번 주는 꼭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번째는 성공이었다. 드디어 둘은 산에 올랐다.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아주 얕은 산이었다. 야 껌이네, 하고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껌인데도 어느새 훅훅 숨이 차는 걸 느끼며 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희준이 말했다. 나 그동안 술을 못 마셨어. 마시면 주정으로 여지없이 남편 탓을 하더라고. 그랬어? 응. 다 너 때문이라고. 사실 걔 때문도 아닌데. 힘들었지. 힘들었어. 내가 너무 지독하게 굴어서 걔가 집을 나갔었어. 처음 취소했을 때, 찾아서 데려오느라 못 온 거야. 웃을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유수는 웃고 말았다. 찾아서 데려왔어? 응. 겨우 데려왔어. 고개를 끄덕이고 희준도 웃었다. 무슨 강아지 얘기하는 것 같네…… 희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금방이었다. 눈에 익은 산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유수는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좀 괜찮다. 오늘 맥주 마실래? ……좋아. 이것까지 도전이지. 그래 맞아. 등산로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말없이 같은 마음으로 호프집에 들어갔다. 맥주를 두 잔 주문하고 가게를 두리번거리던 유수가 벽에 적힌 작은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신청곡 받는대. 희준은 눈을 크게 뜨며 즐거워했다. 아싸. 가게 점원이 생맥주 두 잔과 마른안주를 가져다주었을 때 희준은 침착하게 말했다.
차태현의 「아이 러브 유」 틀어 주세요. 유수는 어깨를 움직일 준비를 했다. 희준과 함께 들썩일 준비. 이 도전은 성공할 것이다, 속으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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