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겨울마다 오래 생각날 따듯한 기억 하나가 생겼습니다. 늘 타던 지하철도 겨울엔 유독 비좁게 느껴지고는 하는데요. 모두 추위와 싸우느라 자기 몸만큼의 옷을 더 겹쳐 입는 까닭이겠지요. 그날도 몹시 추웠고, 이웃들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모두 두꺼운 옷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이 1시간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어요.
모두가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시간대였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줄은 엄청나게 길어져만 갔고, 그러다 마침내 지하철이 도착했습니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이미 비좁았던 공간에 밀고 밀리며 끝도 없이 이웃들이 올라탔습니다. 어느덧 제 앞으로는 커다란 가방이, 뒤로는 다른 사람의 등이 바짝 붙어 오기 시작했고요. 역을 지날 때마다 이웃들의 한숨과 고함도 커져 갔습니다. 더는, 더는 안 될 것 같다, 내려야만 할 것 같다, 생각한 순간 가슴이 턱 막히고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이대로 영원히 숨 쉬지 못할 것 같다는 공포에 짓눌렸을 때 제 안에서 정말 작은 소리가 밀려 나왔습니다.
“살려 주세요.”
그 작은 외침을 누군가는 들었던 걸까요? 왜 그러냐는 질문과, 고개를 돌리며 웅성이던 이웃들. 제 입에선 “숨을…….”이라는 말만 나왔고, 곧장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가슴을 짓누르던 가방이 사라졌고, 오직 제 주변으로만 동그랗게 숨 쉴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한 이웃은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선반에 올린 후 저를 누르던 그 가방을 온몸으로 막아섰습니다. 이웃들은 끊임없이 제가 괜찮은지 말 걸어 주었고, 다음 정류장에서는 “위험하다.”,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제발 멈춰 달라.”라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이웃들의 친절 덕분에 안전하게 지하철에서 내릴 수 있었어요.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그날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은 것은 내가 혼자이지만 않다면, 언제고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어디에든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죠.
『우리는 진짜 진짜 사람입니다』라는 그림책을 만났을 때, 그 믿음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이야기는 한눈에 보아도 다른 별에서 온 존재들이 지구에 불시착하며 시작됩니다. 그들은 한밤중에 리 아저씨네 집 마당에 떨어지지요. 소리를 듣고 놀라 나온 리 아저씨의 눈앞에, 세 명의 낯선 이들이 등장합니다. 눈은 사람보다 10배는 크고 몸은 몹시 새파랬습니다. 누가 보아도 사람이 아닌데, 그들은 자신이 진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리 아저씨는 조금 이상하지만 개의치 않고, ‘친절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합니다. 갈 곳 없는 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 묵게 하고 아침 식사까지 대접하지요. 다른 이웃들도 친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이들이 타고 온 차(라고는 하지만 누가 보아도 비행선)를 수리하기 위해 온 마을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지요. 그림책 속 이웃들은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낯선 이들의 말을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 함께 춤을 춥니다. ‘왜?’라는 질문은 필요치 않아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친절해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니까요. 주제에 맞게 이야기 구조는 쉽고 선명합니다. 친절에 관한 이야기를 이토록 친절하게, 이보다 더 다정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그림책의 작가 엑스 팡은 대만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작가님도 아마 그림책 속 낯선 이처럼 소수가 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겠지요. 성장하며 만난 다정한 이웃 덕분에 이렇게 멋진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볼 때마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림과 여백이 넉넉한 구성은 독자들이 낯선 이들의 모습에 더 집중하게 하고, 스스로 친절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줍니다. 이 책은 얼마 전 ‘에즈라 잭 키츠 상’ 대상을 받기도 했는데, 엑스 팡 작가님은 이렇게 수상 소감을 남겼습니다.
“사소한 친절과 배려가 우주까지 뻗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친절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그런 친절을 경험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엑스 팡
겨울이 지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 그날의 기억을 꺼내 보였습니다. 친구들의 물기 어린 걱정 가운데 또 한 번 저를 진짜 사람으로 살게 한 말을 이곳에 기록해 봅니다.
“앞으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이어폰은 꼭 한쪽만 끼고 있어야겠어.”
“그러니까. 두 쪽 다 끼면 살려 달라는 말을 못 들을 수도 있잖아.”
꽁꽁 얼어붙는 건 날씨뿐이에요. 우리 곁에는 진짜 진짜 사람들이 있어 따듯하고요. 우리 아기가 이 세상에 온 날 제가 처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아가야, 참 잘 왔어.” 그 말이 이렇게 다시 저에게 돌아오네요. 나도 이 세상에 오길, 진짜 진짜 잘했다고요. 진짜 진짜 사람들 덕분에요. 그리고 저는 요즘, 이어폰은 한쪽만 낍니다.